좌절이 잇따라도 본분을 다하라
19세기 프랑스의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은 서양 근대 조각가에서 과거와 현대를 있는 다리 역할을 했던 미술계의 거장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 <생각하는 사람>은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최고의 조각품으로 손꼽힌다. 로댕은 파리의 한 공무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로댕이 전문 기술을 익혀 안정적으로 생활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로댕 본인은 어려서부터 미술에 심취해 아버지의 충고는 귓등으로 흘릴 뿐이었다. 화난 아버지는 로댕의 그림을 찢어버리고 연필을 난로에 던져버렸다. 하지만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그림뿐이었다. 학교생활도 순탄치 못해 꼴찌를 도맡아 했다. 심지어 수업시간 내내 그림만 그리는 그를 보다 못한 선생님이 회초리로 세차게 그의 손을 후려치는 바람에 일주일 동안 연필을 쥐지 못했던 적도 있었다. 다행히 그는 누나의 도움으로 공예미술학교에 진학했고, 회화와 조작의 기초이론 공부하며 조각가의 꿈을 키워나갔다. 당시 그에게는 조각이 삶의 전부이자 사명이었다. 그 후 로댕은 명문 국립미술전문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시험을 쳤으나 작품이 시험관의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연거푸 세 번이다 미끄러졌다. 좌절한 로댕은 더 이상 정부가 운영하는 예술학교에 원서를 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게다가 얼마 후 재정적으로 도움을 주던 누나가 병으로 세상을 뜨면서 미술에 대한 그의 꿈도 좌초되는 듯했다. 그는 주체할 수 없는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어 갔고, 결국 수도원에 숨어들고 말았다. 그러나 다행히 수도원장의 격려에 힘입어 예술을 하겠다는 의지를 다시 불태우며 반년 만에 수도원을 나왔다. 로댕이 자신감을 잃어갈 때마다 공예미술학교의 스승이었던 르콕이 한결같이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었다. 로댕은 그의 모델이자 연인이었던 마리 로즈 뵈레를 만나면서부터 창작 인생에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초기작품 <코가 부러진 사나이>를 살롱에 출품했으나 그에게 돌아오는 건 냉랭하고 싸늘한 비난 세례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불철주야 조각 작업에만 매달렸다. 한동안 그는 벨기에에서 조각가 반 라스부르(Van Rasbourg)와 동업으로 건축 장식조각 일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안정을 되찾았다. 그는 이때 모은 돈으로 로마와 피렌체 등지를 여행 다니며 각 시대별 대가들의 작품을 연구했다. 로댕이 당시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예술적으로 한층 성숙해졌다. 그 후 브뤼셀로 돌아온 그는 <청동시대>를 제작하는 데 공을 들였다. 하지만 조각의 묘사가 섬뜩하리만치 사실적이라는 이유로 출품 당시 사람의 시체에다 직접 본을 떠서 만들었다는 의심을 샀다. 로댕이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해명하고, 단기간의 정부 조사를 거치고 나서야 틀림없는 로댕의 창작품임이 인정되었다. 이렇게 해프닝이 일단락되면서 로댕의 인기와 몸값은 서서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그 후 로댕은 벨기에에서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때는 프랑스 상류사회의 일각에서 그의 작품세계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1880년, 프랑스 정부는 새로 짓는 장식미술관 출입문의 디자인을 로댕에게 의뢰했다. 로댕은 이탈리아 시인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편」에서 영감을 얻어 <지옥의 문>이라는 방대한 스케일의 작품을 구상했다. 이 작품은 로댕이 전생을 걸고 20여 년 동안 아이디어의 일부는 다른 작품 속에 또 다른 모습으로 반영되어 있다. 1891년, 로댕은 프랑스문학협회의 의뢰를 받아 만든 발자크 기념상 때문에 또다시 구설수에 휘말렸다. 그도 그럴 것이 로댕이 형상화한 발자크는 넝마를 걸친 초라한 취객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충격을 받은 문학협회는 정색을 하며 작품의 인수를 거절했다. 그러나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로댕의 작품 171점이 특별 전시되었고, 이곳에서 그의 실력과 명성이 보란 듯이 입증되었다. 수천 명에 달하는 관람객들이 <지옥의 문>, <발자크>, <빅토르 위고> 등의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몰려들었고, 세계 각지에서 온 예술가와 유명 인사들의 감탄이 이어졌다. 이로써 로댕은 프랑스를 넘어서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각국의 박물관들도 앞다투어 그의 작품을 사들이면서 한때 로댕 작품 구매 열풍이 불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로댕은 성공적인 예술가로 거듭났다. 1904년, 로댕은 런던의 국제미술협회 회장으로 초빙됨으로써 예술인으로 최고의 명예를 획득하고, 삶의 정점을 향해 치달아갔다. 화려한 타이틀 앞에서도 로댕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유일한 생은 조각이었다. 그는 사람의 실물 두 배 크기로 <생각하는 사람>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고뇌와 사색에 빠진 인간이 선과 악의 유혹으로 내면의 갈등을 겪는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이 조각 작품에는 그의 지치지 않는 예술혼이 서려 있다. 사명감은 인간이 스스로에서 부여하는 일종의 책임감이다. 사명감이 투철한 사람들은 내면에 강인한 의지가 잠재되어 있다. 그들은 연속적으로 닥쳐오는 좌절 속에서도 잠재된 의지력을 강하게 단련시켜 자신을 더욱 성실하고 용감하며, 과감하게 틀을 깰 줄 아는 사람으로 다져나간다. - 성공하고 싶을 때 일하기 싫을 때 읽는 책, 바이취엔전, 강경이 옮김, 도서출판 주변의 길 & 새론북스, 2007 참고문헌